인간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몸과 마음이 성장하고 쇠퇴한다. 그러면서 행한 것, 겪은 것, 모든 것들을 품은 채. 삶의 흐름 그 끝에는 어떤 결과가 존재하는 것일까?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통해 그 누구도 자신의 인생이 오롯이 자기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음을 느꼈고, 시간과 신의 다듬질로 살아가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나의 작업은 책이나 한지 등 종이를 갈아서 죽으로 만든 후 여러 가지 재료들을 혼합하여 이미지 판을 떠내는 캐스팅 형식의 작업이다. 종이는 판의 이미지보다 중요하다. 종이는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이는 몸과 마음이며 판은 외부의 자극이다.
종이는 약하지만 질기고, 변해도 그대로 자연이 된다는 점이 좋다. 외부의 자극인 판에 의해 변형되고, 다양한 색채와 재료에 섞이는 등의 과정을 통해 하나의 화면으로 재탄생된다. 갖가지 재료들은 종이와 섞이는 과정에서 또 다른 모습으로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며, 서로가 서로에게 반영된다. 이렇게 재료들이 개입된 캐스팅 작업은 우연의 효과가 있다. 이것은 나의 작업에서 종이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다. 내가 의도하고 계획하고, 만든 결과는 의도를 벗어난 다른 무언가를 산출한다.
작업의 결과물은 다시 나에게 삶의 과정에서 또 다른 자극이 되어서 내 삶 속 어딘가에 각인되고 영향을 줄 것이다.